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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한글일까 한자어일까? 그리고 언제부터 장마란 단어를 사용했을까? 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장마의 어원을 '댱 (長) + 맣'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千字文, 訓蒙字會와 더불어 한문교습에 사용되었던 新增類合 2卷 1冊 (선조 9년 (1576)에 간행)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영조 24년 (1748)에 간행된 만주어의 사전류인 同文類解까지 '댱마 霖', '댱마디다 下霖雨'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장마와 비슷한 '쟝마'가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영조말년 이후 간행된 문헌부터이다. 숙종 16년 (1690)에 간행된 일종의 번역서인 譯語類解의 단점을 보완하여 김홍철이 편찬한 譯語類解補 (영조 51년 (1775)에 간행)1卷과 만주어를 구분하여 거기에 한문과 한글로 뜻을 쓰고 만주어음을 한글로 표기한 만주어사전인 漢淸文鑑 (영조말년경 간행)에 '쟝마ㅅ비 霖雨'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고종 17년 (1880)에 간행한 도교에 대한 해설을 한글로 적은 敬信錄諺解 78章에 '가물과 쟝마'라는 표현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댱 (長) + 맣'을 장마의 어원으로 보면, 장마는 '긴', '오랜'이란 뜻의 한자어 長과 '마ㅎ'의 합성어이다. 

그럼 '마ㅎ'는 무슨 뜻일까? 우리말의 어원을 설명하는 우리말의 뿌리 (안옥규, 1994)와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 (백문식, 1998)에 '마ㅎ'는 물(水)의 옛말로 '말갛다', '맑다'라고 할 때의 '말'의 옛 형태인 '마라'의 준말로 설명되어 있다. 즉 '마'는 물의 옛 형태인 '무르'와 형태 변종이다. 

三國史記에서는 買 (mai)로 표기했다 (백문식, 1998). 의미 관계로 볼 때 '마ㅎ'의 변이음이 '비(雨)' 가능성이 크다. 고려 숙종때 서장관으로 개성에 왔다가 당시 고려인들이 사용하던 언어 353개를 추려 설명한 중국 송나라 사람 손목의 鷄林類事에 '비'를 雨曰 微라 하여 오늘날의 발음 '비'와 일치한다. 

윤선도의 시문집으로 1798년에 간행된 孤山遺稿에는 장마를 '마ㅎ'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장마는 순한글도 한자어도 아닌 한글과 한자 합성어이며, 그리고 장마를 의미하는 한자 霖이 선조 9년 (1576)에 간행된 한자교습서 新增類合에는 "霖 댱마 림"이라 풀이되어 있지만, 그보다 일찍 간행된 한자교습서 訓蒙字會(중종 22년, 1527)에는 "霖 오란비 림"으로 풀이되어 있는 점에 미루어 장마의 어원인 '댱마'의 옛말은 '오란비'라고 추정된다. 

백문식(1998)의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 에도 장마의 순수고유어는 '오란비'라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여러 날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1500년대 이전에는 '오란비'로 표현하다가 1500년대 중반부터 '오랜'의 한자어인 '長'과 '비'를 의미하는 '마ㅎ'를 합성한 '댱마ㅎ'로 표현되다가 '쟝마', '장마'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 출처 : 곽종흠 한국기상학회






6월 19일 새벽부터 시작된 장마로 20시간동안 대략 70mm 정도의 비가 내렸다. 


주말농장 텃밭에는 전체적으로 배수에 문제가 없는데 농장에서 흘러나온 물이모여 빠져나가는 배수관이 막혀있다. 


반대쪽까지 이어놓은 배수관을 길 겉너 밭 포크레인 공사 때 훼손해 놓은 듯 싶다. 관에 흙이 밀려들어가 위로 갈라진


틈을 통해 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당연히 물이 더디게 빠져나가 모인 물이 농장 하우스 안까지 들어찼다. 임시방편으로 중간에 배수로를 만들었지만..


이제 막 시작된 장마에 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형편...  덕분에 이웃집 고추밭에도 물이 가득 들어찼다.


큰 돈들여 배수로 공사까지 했는데 내 것 아니라고 마음대로 훼손한 사람들에게 서운할 뿐이다.


비가 우선 그치기만 기다려본다...



장마로 가기 전, 6월의 주말농장에는 녹음이 푸르릅니다. :)










Rosenberg Trio-"Moonlight Serenade"

2013. 6. 13. 08:05 | Posted by fourseasons






– 로젠버그 트리오 (The ROSENBERG TRIO)-











original post from  

산골농부자연밥상  블로그


written by 자줏빛구름님 in 2012.03.06 


원문글보기


『농사월령가』를 지은 정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민『삶을 바꾼 만남』가운데



삶을 바꾼 만남


작가   정민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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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을까?

『농사월령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작자가 누군지는 몰랐다. 작자 미상이거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거니 했었는데

정민 교수의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다룬 『삶을 바꾼 만남』을 보다가 다산의 둘째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오호!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



다산 정약용의 큰 아들이 학연, 둘째 아들이 학유.

『삶을 바꾼 만남』에서 정학유는 형 학연과 더불어 황상과 친분을 갖고 있었지만 책에 등장하는 빈도는 형에 비해 적었고

그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그렇게 두드러지는 것이 없어서 조용히 살다가 생을 마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문 500쪽에 이르러 그의 죽음과 함께 『농사월령가』를 거론하니 놀랄밖에..  

 

1855년 2월 1일에 정학유가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떴고, 2월에 추사가 황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학유는 오래 병을 앓았다. 송도 여행 때도 몸이 아파 동행하지 못했다. 6년 전 황상이 강진으로 내려올 당시 36운에 달하는 장편시를 지어주면서도, 자신이 직접 쓰지 못하고 아들을 시켜 대신 적게 했을 만큼 건강이 나빴다. 그는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그늘과 형의 명성에 가려 이렇다 하게 알려진 자취는 없지만, 속이 깊고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다. 널리 알려진 『농사월경가』를 그가 지었다.(500~501쪽)

 

추사는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황상을 찾아갔었고, 때마침 황상은 정학연을 찾아 서울 나들이 길이라 길이 어긋났다.

서로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첫 대면은 정학연의 주선으로 추사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농사월령가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사. 1책. 필사본. 월령체(月令體) 장편가사이다. 작자가 고상안(高尙顔)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정학유로 고증되었다. 필사 이본으로는 권경호본(權卿鎬本, 1876)·이탁본(李鐸本)·정규영본(丁奎英本, 1925)·안춘근본(安春根本)·이능우본(李能雨本) 등이 전하고 있다.

 

정학유(丁學游 1786~1855)

조선 후기 문인. 본관 나주(羅州). 자 문장(文牂). 호 운포(耘逋). 정약용(丁若鏞)의 둘째 아들. 1808년(순조 8)에는 형 학연(學淵)과 함께 유배중인 아버지의 《주역심전(周易心箋)》을 정리하여 완성시키는 등 정약용의 학문활동을 도왔다. 1816년(순조 16) 농가에서 매달 할 일과 풍속 등을 한글로 읊은 《농사월령가》를 지었다. 




황상(1788~1870)은 학연 보다 다섯 살 아래이고 학유 보다는 두 살이 많다.

나이도 차이가 나고 신분도 다르지만 그들은 다산 타계 후에도 자신들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너무도 멋지게 어울렸다.  

큰 아들 학연은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 있을 때 아버지를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황상과 만나 의기투합이 되었고 

다산이 해배가 되어 서울로 돌아간 후에는 황상이 산골에 운둔하다시피 살면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지기도 했다.  

다산의 임종이 가까운 1836년, 황상은 스승과 18년만의 재회를 이룬다. 이때 다산이 일흔다섯, 황상은 마흔아홉이었다.

(1801년 11월에 강진에 유배되어 내려간 다산이 본가로 돌아온 것은 1818년 9월 15일)

『삶을 바꾼 만남』황상의 제자입문기 =>



다산이 세상을 떠난 후, 학연 형제와 황상은 이전 보다 더 돈독해지는데 두 형제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보면 애타는 그리움과 서로의 글에 대한 감탄과 존경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그런데 그 학유, 정학유가 농사월령가를 지었다고?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 다산의 가르침이 그러했고 본인의 성품이 또한 그러했으니까..

다시금 앞장으로 넘어가 학유에 관한 구절을 찾아보았다.

  

들째 정학유(1786~1855)는 열여섯 살 나던 해에 아버지와 헤어져, 어느덧 스물한 살의 청년이 되었다. 한창 포부를 키워갈 나이에

문득 꺾이자 그는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고 말수도 부쩍 줄었다. 그래도 그는 진중한 젊은이였다. 재주는 형만 못했지만 사람이 진득했다.

정학유는 형님 편에 전해온 아버지의 편지를 펼쳤다. 첫 줄부터 공부 때를 놓친 걱정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네가 닭을 친다고 들었다.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저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 능히 농서(農書)를 익히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보도록 해라. 색깔별로 갈라도 보고, 횃대를 다르게도 해보거라.

닭이 살찌고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나아야 한다. 또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해야지.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이야말로 독서하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모르면서

부지런히 애써 골몰하여 이웃 채마밭 노인과 아침저녁으로 다투는 것은 다만 세 집만 사는 작은 마을의 못난이의 양계일 것이니라. 네가 어떤 것을 편안해할지 모르겠구나. 이왕 닭을 치려거든 『백가서百家書』를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짓도록 해라. 육우(陸羽, 당나라의 문인 다성多聖으로 일컬어진다)의 『다경茶經』이나 유득공의 『연경』처럼 한다면 또한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속된 일을 하면서도 맑은 운치를 띠려면 모름지기 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앞서 보낸 편지에서 학유가 닭을 쳐보겠다는 결심을 비추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이 글을 썼다.

“닭을 치는 일도 일종의 공부다. 그저 하지 말고 살펴서 해라. 책 찾아서 읽어가며 해라. 보는 것 정리하고 메모해가며 해라. 여러 책에서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갈래별로 묶어 『계경』을 엮어보는 것은 어떻겠니. 이렇게 하면 또 하나의 근사한 책이 될 게다.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222~223쪽)

 

 

*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외에도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글이 당부의 내용들이다. 시시콜콜, 조근조근, 조목조목...

다산 초당으로 옮기고 비로소 안정을 취하게 되면서 1808년 둘째 아들 학유가 아버지를 뵈러오는데 학유의 나이 스물 셋,

모자가 헤어진 지 8년 만이다. 학유는 2년 가까이 아버지를 도와가며 그간 소홀히 한 공부를 다잡는다.   

이 시절 공부의 내용은 그해 겨울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있다.


“네 아우의 재주는 형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다. 올여름 고시와 산부(산문 형식의 부)를 짓게 했더니 벌써 좋은 작품이 꽤 많다.

가을 동안 ‘주역’을 손보아 베껴 쓰는 작업에 골몰하느라 독서를 할 수 없었지만, 견해가 조잡하지는 않았다.(314)

 

 

**

1845년 정학연의 청으로 학연 형제와 황상은 두 집안 간에 계를 맺는다.

 

"우리 이참에 정씨와 황씨 두 집안끼리 정황계(丁黃契)를 맺기로 하세. 두 집안의 부자와 자손의 성명과 자호, 나이 등을 차례로 적고, 돈독한 의리를 서술하여 대대로 우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증서를 만들잔 말일세."

정황계를 맺은 사연을 두 벌 적어 각각 한 벌씩 나눠 가지게 했다. 이것이 정황계안(丁黃契案)이다. 계안을 적은 정학연 친필의 원본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417쪽)

 

요즈음도 이런 방식의 계가 있을까...

이때 정학연은 송도에 바람 쐬러 가자고 권하는데 아우 정학유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함께 가지 못하고 정대림과 젊은이 몇이 함께 동행했다고 나와 있다. 대림은 정학연의 큰아들, 다산의 큰손자이며 황상의 큰아들과 동갑이다. 학연과 황상의 첫 아들 출생은 다산이 강진에 머물 때 였고, 다산은 황상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네 아들은 내 손자'라고 반겨했다. 

 

 

***

정학연과 황상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중심에 다산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인품과 시문에 관한 남다른 깊이가 서로 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36년의 첫 번째 상경에 이은, 1845년의 두 번째 상경으로 황상과 정학연 형제의 교유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황상의 질박하고도 웅숭깊은 마음자리와 그의 시문이 보여주는 깊은 울림은, 정학연의 소개를 통해 그가 교유하던 장안의 명류들에게 널리 희자되면서 큰 화제를 낳았다.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도 그런 이가 있느냐며 놀라워 했다. 열다섯에 다산을 처음 만난 이후 40여 년을 자취 없이 묻혀 살던 황상은 쉰여덟에서야 뒤늦게 중앙 시단에 데뷔하여 존재감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422쪽) 

 

정학연 형제는 황상을 친형제의 의리로 대했다. 이들 사이에 전후로 오간 수십 통의 편지는 안타깝고, 그리운 사연이 곡진하다. 학연은 황상의 아들 농무에게도 따로 편지를 썼다. “효도로 봉양함은 몸소 밭 갈고 농사하는 여가에『논어』와 『효경』을 읽으며 천륜의 즐거움을 펴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아! 우리 우여(농무의 자)는 힘쓰고 힘쓸진저. 난 이제 죽음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 집안의 네종형제는 여태도 나이가 젊구나. 비록 천릿길이 막혀 있더라도 너는 두 집안이 대대로 한형제의 우의로써 반드시 한집안 골육의 사이로 지내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기 바란다. 비록 우리 형제가 세상을 뜬 뒤라도 지난날의 정스런 교분을 잊지 않기를 빌고 또 빈다.(434쪽)

 

 

****

정학연, 학유, 황상, 세 사람 중에 제일 연하인 정학유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학연, 그리고 황상... 

『농사월령가』라는 글이 있는 줄은 별학섬에 머물 때 사부님을 통해서 소책자로 간행된 허름한 인쇄물을 보면서였다.

원문과 차이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의 해박함과 시적인 운율에 감탄했었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는다. 이름과 더불어 그들이 남긴 흔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배움을 일깨워준다.

다산이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한 구절 뽑아볼까.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_()_

 







여름의 시작인 입하(夏:음력3월26일)도 지나고, 여름날씨같은 요즘입니다.


농장 곳곳의 풍경입니다... :)









(음력)사월이라 초여름되니 입하(夏) 소만(小滿)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나니 날씨도 좋아라 .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보리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가 난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도 이제 막 한창이라.  남녀노소 바삐 뛰며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사립문을 녹음 속에 닫았도다. 


면화를 많이 하소 방적의 근본이니 수수 동부 녹두 참깨 간작(사이 사이에 다른 농작물을 심는 일)을 적게 하소 . 갈 꺾어 거름할 때 풀 베여 섞어하소. 물댄 논을 써레하고 이른 모 내어보자.  농사량이 부족하니 가을에 갚기로 하고 관청에서 꾸어다 보태리라.

한잠 자고 이는 누에(누에는 다섯 번 잠을 잔다) 하루에도 열두 밥을, 밤낮을 쉬지말고 부지런히 먹이리라. 뽕따는 아이들아 나무를 보살펴서 고목은 가지 찍고 햇잎은 제쳐서 따소. 찔레꽃 만발하니 적은 가물 없을소냐 . 이 때를 당하여 내가 할 일 생각하소. 도랑 쳐 물길 내고 비새는 곳 기와 고쳐 장마비를 방비하면 뒷근심 더나니라. 봄에 짠 무명필을 이 때에 표백하고  베모시 형세대로 여름옷 지어두소. 벌통에 새끼나니 새 통에 받으리라. 모든 벌이 한 마음으로 왕벌을 호위하니 꿀 먹기도 하려니와 신하의 본분 깨닫도다.

사월이라 초파일날 등불을 켜놓은 일은 산속의 농가에서 요긴하지 않으나, 느티떡 콩찐이는 제때에 별미로다. 앞 내에 물이 줄어드니 고기사냥 하여 보자. 해 길고 바람 잔잔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시내가 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연꽃) 늦은 꽃엔 봄빛이 남았구나. 눈이 촘촘한 그물을 둘러치고 큰 물고기를 후려 내여 바위돌에 가마솥 걸고 부글부글 끓여내니 이 세상에 팔진미요 맛있는 요리 이 맛에 비길소냐.



정학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정학유(丁學游,1786년~1855년)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둘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