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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자줏빛구름님 in 201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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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월령가』를 지은 정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민『삶을 바꾼 만남』가운데



삶을 바꾼 만남


작가   정민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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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을까?

『농사월령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작자가 누군지는 몰랐다. 작자 미상이거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거니 했었는데

정민 교수의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다룬 『삶을 바꾼 만남』을 보다가 다산의 둘째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오호!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



다산 정약용의 큰 아들이 학연, 둘째 아들이 학유.

『삶을 바꾼 만남』에서 정학유는 형 학연과 더불어 황상과 친분을 갖고 있었지만 책에 등장하는 빈도는 형에 비해 적었고

그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그렇게 두드러지는 것이 없어서 조용히 살다가 생을 마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문 500쪽에 이르러 그의 죽음과 함께 『농사월령가』를 거론하니 놀랄밖에..  

 

1855년 2월 1일에 정학유가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떴고, 2월에 추사가 황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학유는 오래 병을 앓았다. 송도 여행 때도 몸이 아파 동행하지 못했다. 6년 전 황상이 강진으로 내려올 당시 36운에 달하는 장편시를 지어주면서도, 자신이 직접 쓰지 못하고 아들을 시켜 대신 적게 했을 만큼 건강이 나빴다. 그는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그늘과 형의 명성에 가려 이렇다 하게 알려진 자취는 없지만, 속이 깊고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다. 널리 알려진 『농사월경가』를 그가 지었다.(500~501쪽)

 

추사는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황상을 찾아갔었고, 때마침 황상은 정학연을 찾아 서울 나들이 길이라 길이 어긋났다.

서로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첫 대면은 정학연의 주선으로 추사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농사월령가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사. 1책. 필사본. 월령체(月令體) 장편가사이다. 작자가 고상안(高尙顔)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정학유로 고증되었다. 필사 이본으로는 권경호본(權卿鎬本, 1876)·이탁본(李鐸本)·정규영본(丁奎英本, 1925)·안춘근본(安春根本)·이능우본(李能雨本) 등이 전하고 있다.

 

정학유(丁學游 1786~1855)

조선 후기 문인. 본관 나주(羅州). 자 문장(文牂). 호 운포(耘逋). 정약용(丁若鏞)의 둘째 아들. 1808년(순조 8)에는 형 학연(學淵)과 함께 유배중인 아버지의 《주역심전(周易心箋)》을 정리하여 완성시키는 등 정약용의 학문활동을 도왔다. 1816년(순조 16) 농가에서 매달 할 일과 풍속 등을 한글로 읊은 《농사월령가》를 지었다. 




황상(1788~1870)은 학연 보다 다섯 살 아래이고 학유 보다는 두 살이 많다.

나이도 차이가 나고 신분도 다르지만 그들은 다산 타계 후에도 자신들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너무도 멋지게 어울렸다.  

큰 아들 학연은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 있을 때 아버지를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황상과 만나 의기투합이 되었고 

다산이 해배가 되어 서울로 돌아간 후에는 황상이 산골에 운둔하다시피 살면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지기도 했다.  

다산의 임종이 가까운 1836년, 황상은 스승과 18년만의 재회를 이룬다. 이때 다산이 일흔다섯, 황상은 마흔아홉이었다.

(1801년 11월에 강진에 유배되어 내려간 다산이 본가로 돌아온 것은 1818년 9월 15일)

『삶을 바꾼 만남』황상의 제자입문기 =>



다산이 세상을 떠난 후, 학연 형제와 황상은 이전 보다 더 돈독해지는데 두 형제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보면 애타는 그리움과 서로의 글에 대한 감탄과 존경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그런데 그 학유, 정학유가 농사월령가를 지었다고?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 다산의 가르침이 그러했고 본인의 성품이 또한 그러했으니까..

다시금 앞장으로 넘어가 학유에 관한 구절을 찾아보았다.

  

들째 정학유(1786~1855)는 열여섯 살 나던 해에 아버지와 헤어져, 어느덧 스물한 살의 청년이 되었다. 한창 포부를 키워갈 나이에

문득 꺾이자 그는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고 말수도 부쩍 줄었다. 그래도 그는 진중한 젊은이였다. 재주는 형만 못했지만 사람이 진득했다.

정학유는 형님 편에 전해온 아버지의 편지를 펼쳤다. 첫 줄부터 공부 때를 놓친 걱정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네가 닭을 친다고 들었다.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저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 능히 농서(農書)를 익히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보도록 해라. 색깔별로 갈라도 보고, 횃대를 다르게도 해보거라.

닭이 살찌고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나아야 한다. 또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해야지.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이야말로 독서하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모르면서

부지런히 애써 골몰하여 이웃 채마밭 노인과 아침저녁으로 다투는 것은 다만 세 집만 사는 작은 마을의 못난이의 양계일 것이니라. 네가 어떤 것을 편안해할지 모르겠구나. 이왕 닭을 치려거든 『백가서百家書』를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짓도록 해라. 육우(陸羽, 당나라의 문인 다성多聖으로 일컬어진다)의 『다경茶經』이나 유득공의 『연경』처럼 한다면 또한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속된 일을 하면서도 맑은 운치를 띠려면 모름지기 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앞서 보낸 편지에서 학유가 닭을 쳐보겠다는 결심을 비추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이 글을 썼다.

“닭을 치는 일도 일종의 공부다. 그저 하지 말고 살펴서 해라. 책 찾아서 읽어가며 해라. 보는 것 정리하고 메모해가며 해라. 여러 책에서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갈래별로 묶어 『계경』을 엮어보는 것은 어떻겠니. 이렇게 하면 또 하나의 근사한 책이 될 게다.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222~223쪽)

 

 

*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외에도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글이 당부의 내용들이다. 시시콜콜, 조근조근, 조목조목...

다산 초당으로 옮기고 비로소 안정을 취하게 되면서 1808년 둘째 아들 학유가 아버지를 뵈러오는데 학유의 나이 스물 셋,

모자가 헤어진 지 8년 만이다. 학유는 2년 가까이 아버지를 도와가며 그간 소홀히 한 공부를 다잡는다.   

이 시절 공부의 내용은 그해 겨울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있다.


“네 아우의 재주는 형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다. 올여름 고시와 산부(산문 형식의 부)를 짓게 했더니 벌써 좋은 작품이 꽤 많다.

가을 동안 ‘주역’을 손보아 베껴 쓰는 작업에 골몰하느라 독서를 할 수 없었지만, 견해가 조잡하지는 않았다.(314)

 

 

**

1845년 정학연의 청으로 학연 형제와 황상은 두 집안 간에 계를 맺는다.

 

"우리 이참에 정씨와 황씨 두 집안끼리 정황계(丁黃契)를 맺기로 하세. 두 집안의 부자와 자손의 성명과 자호, 나이 등을 차례로 적고, 돈독한 의리를 서술하여 대대로 우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증서를 만들잔 말일세."

정황계를 맺은 사연을 두 벌 적어 각각 한 벌씩 나눠 가지게 했다. 이것이 정황계안(丁黃契案)이다. 계안을 적은 정학연 친필의 원본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417쪽)

 

요즈음도 이런 방식의 계가 있을까...

이때 정학연은 송도에 바람 쐬러 가자고 권하는데 아우 정학유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함께 가지 못하고 정대림과 젊은이 몇이 함께 동행했다고 나와 있다. 대림은 정학연의 큰아들, 다산의 큰손자이며 황상의 큰아들과 동갑이다. 학연과 황상의 첫 아들 출생은 다산이 강진에 머물 때 였고, 다산은 황상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네 아들은 내 손자'라고 반겨했다. 

 

 

***

정학연과 황상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중심에 다산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인품과 시문에 관한 남다른 깊이가 서로 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36년의 첫 번째 상경에 이은, 1845년의 두 번째 상경으로 황상과 정학연 형제의 교유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황상의 질박하고도 웅숭깊은 마음자리와 그의 시문이 보여주는 깊은 울림은, 정학연의 소개를 통해 그가 교유하던 장안의 명류들에게 널리 희자되면서 큰 화제를 낳았다.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도 그런 이가 있느냐며 놀라워 했다. 열다섯에 다산을 처음 만난 이후 40여 년을 자취 없이 묻혀 살던 황상은 쉰여덟에서야 뒤늦게 중앙 시단에 데뷔하여 존재감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422쪽) 

 

정학연 형제는 황상을 친형제의 의리로 대했다. 이들 사이에 전후로 오간 수십 통의 편지는 안타깝고, 그리운 사연이 곡진하다. 학연은 황상의 아들 농무에게도 따로 편지를 썼다. “효도로 봉양함은 몸소 밭 갈고 농사하는 여가에『논어』와 『효경』을 읽으며 천륜의 즐거움을 펴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아! 우리 우여(농무의 자)는 힘쓰고 힘쓸진저. 난 이제 죽음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 집안의 네종형제는 여태도 나이가 젊구나. 비록 천릿길이 막혀 있더라도 너는 두 집안이 대대로 한형제의 우의로써 반드시 한집안 골육의 사이로 지내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기 바란다. 비록 우리 형제가 세상을 뜬 뒤라도 지난날의 정스런 교분을 잊지 않기를 빌고 또 빈다.(434쪽)

 

 

****

정학연, 학유, 황상, 세 사람 중에 제일 연하인 정학유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학연, 그리고 황상... 

『농사월령가』라는 글이 있는 줄은 별학섬에 머물 때 사부님을 통해서 소책자로 간행된 허름한 인쇄물을 보면서였다.

원문과 차이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의 해박함과 시적인 운율에 감탄했었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는다. 이름과 더불어 그들이 남긴 흔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배움을 일깨워준다.

다산이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한 구절 뽑아볼까.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