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스캣을 정말 잘 한다. 그런데 그녀의 스캣은 그냥 ‘잘 한다’고만 넘어갈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말로 특유의 강단이 느껴진다고 할까? 재즈 보컬리스트라고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록커 못지않은 힘과 파괴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공연을 볼 때마다 ‘용감한 목소리’라는 독특한 표현을 떠올리곤 했다. 지난 두 장의 앨범, 『벚꽃지다』 『지금, 너에게로』가 한국적 정서라는 이름의 처연함을 표현했다면, 이번 『This Moment』는 말로라는 보컬리스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당연히 그 어느 때보다 특유의 ‘용감한’ 말로표 보컬을 만끽할 수 있다.
창작곡이 아닌 스탠다드 넘버 모음집이라고 이 앨범을 전작들보다 낮춰볼 이유는 없다. 재즈-블루스라는 장르의 특성 상, 얼마나 자신의 색으로 음악을 소화해내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기타리스트 박주원과 콤비를 이룬 말로의 선택은 성공했다. 기타라는 악기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감수성을 한껏 선보이는 기타리스트 박주원과 앨범 전체의 틀을 잡아주는 베이시스트 서영도가 빚어낸 환상적인 연주 위에서 말로는 맘껏 달려 나가기도 하고, 고즈넉하게 읊조리기도 하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일견 ECM 레이블 출신 음악들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결과는 말로 특유의 음악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전작들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맴도는 것이냐 하면, 결단코 아니다. 말로의 색이되,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말로 본연의 모습이란 게 나의 감상이다. 그리고 말로 고유의 색은 블루스에서 제대로 피어나고 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는 것도 덧붙여야겠다.
신들린 기타 박주원과 말로의 주고받기
당장 첫 곡 「Devil May Care」를 들어보라.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되는 가벼운 랙타임 위로 자유롭게 노니는 말로의 허스키하면서도 날이 선 스캣과 노래는 기타의 풍부한 울림과 어우러져 최고의 앙상블을 만든다. 랙타임이지만 박주원의 솔로는 라틴재즈를 연상시킬 만큼 자유롭다. 이번 앨범에서 말로의 목소리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박주원의 신들린 기타연주이다. 만일 그가 이번 앨범의 핵심이라 할 블루스에만 초점을 둬 펜타토닉 스케일만 짚었더라면 앨범의 흥미는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Blues in the Night」의 12마디 블루스에서 그의 리듬 커팅은 단순해지기 쉬운 곡을 다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블루스의 기본인 기타와 보컬 사이의 콜앤리스펀스(Call and Response)는 특히 이 곡에서 핵심인데, 말로와 박주원의 연주는 보컬이 선창하는 멜로디를 따르기보다 마치 두 보컬이 주고받는 것 같은 풍부한 표정의 연주를 담고 있다. 「Sunny」의 날아갈 듯 가벼운 감성은 힘을 뺀 말로의 목소리 못지않게 속도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고 정교하게 리듬을 만드는 기타리스트의 능력에 기인한다. 이 앨범에서의 박주원의 기타 연주는 조규찬, 이소라 등 색깔 있는 보컬리스트의 앨범에서 활약하던 다양한 감수성의 세션의 경지를 넘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아티스트로 한 발을 내딛은 느낌이다. 12마디 블루스의 AABA 형식 안에서 스패니쉬 풍의 솔로가 스치듯 지나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묘한 감동을 자아낸다.
앨범에는 박주원과 함께하는 블루스, 랙타임 외에도 기존 말로 스타일에 가까운 처연함이 느껴지는 슬로우 곡들도 물론(!) 등장한다. 특히 「Wayfaring Stranger」와 아일랜드 민요 「Danny Boy」, 버트 바카락(Burt Bacharach)의 「That`s What Friends are for」는 말로의 곡 지배력을 확인시켜주는 트랙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어떤 곡이건 말로의 감수성으로 녹여낼 수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트랙이다. 그러나 이 앨범을 감상하며 보다 뿌듯해지는 것은 말로의 보컬이 보여줄 수 있는 감수성이 더 다양한 스타일로 확대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데 있다. 앞서 언급한 곡들 외에도 앨범의 핵심인 「비야 비야」와 스캣으로 구성된 「Samba for Carmen」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곡이다. 그리고 이러한 드라마틱한 곡을 주조해내는 데 있어, 박주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조용히 마각을 드러낸다. 바로 베이시스트 서영도다.
커다란 감동의 손짓 하나, 서영도의 베이스
중심을 잡는 베이스의 역할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비야 비야」를 반드시 들어볼 필요가 있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말로의 보컬과 같은 비율로 중요한 것이 기타라면, 베이스는 이들 모두를 받아주면서도 말로 보컬 드라마의 숨겨진 반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서영도의 베이스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그 둥근 울림은 어쿠스틱 기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파장과 말로의 끝을 보자는 모양으로 용감하리만치 치고 나가는 보컬 모두를 자연스럽게 감싸 앨범으로 수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드럼과 퍼커션까지 동원, 살랑거리는 리듬감을 살린 부드러운 삼바「Samba for Carmen」에서 다양한 악기와 오버더빙 된 코러스까지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로 모아주는 것도 서영도의 오른손이다. 현을 튕기는 손짓 하나가 얼마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말로의 목소리는 스윙하는 리듬 위를 부유하지 않는다. 그녀의 스캣과 노래는 스윙하며 화성을 따르긴 하지만 결단코 악기와 묻어가지 않는다. 차라리 악기를 지배한다. 악기와 융합하기보다 그 위에서 장악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말로의 목소리다. 그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용감무쌍하다. 그래서 그녀는 사라 본(Sarah Vaughan)보다 「Strange Fruits」을 부르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를 닮아 있다. 또한 한 곳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몸짓과 소리짓은 니나 시몬(Nina Simone)에 가깝다. 그러나 니나와 달리 말로는 밴드의 연주형태 변화에 자신의 모습을 맞추지 않는 것에서 비타협주의자에 가깝다.
흔히 말로의 음악에 ‘한국적 재즈’라는 수식을 붙이곤 한다. 『벚꽃지다』는 그 증거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말로는 어떤 틀 하나로 가둬두기엔 너무나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말로라는 재즈 아티스트가 가진 에너지의 극점을 보여주기 위해 스탠다드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으로 합리적이었다. 요즘 ‘합리성’이란 말이 유행인 모양이다. 그런데 합리성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쌓이고 변화해 온 기존의 무엇을 파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새로운 틀(합리적이라고 보이는)로 찍어 눌러서 나오는 게 아니다. 현재에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얼마나 자신의 깜냥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운영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과 어울리는 조력자를 자꾸 발굴하고 함께 조정해나가는 것이다. 말로의 『This Moment』앨범은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이 보여주는 합리성의 훌륭한 표본이라 하겠다.
박주원의 기타연주에 말로의 노래...라니! 말로5집 앨범자켓을 손에들고 노래를 듣기도 전에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그녀의 앨범들과 라이브 공연은 나에게 기꺼히 찾아듣고 찾아볼만한 대단한 명음반, 명공연이다. 가수 "말로"는 영어로 Malo, 그녀의 본명은 "정말로"(실명) 이다. 3집 "벗꽃지다"때 처음 알고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들었던 그녀의 4집음반(너에게로 간다) 은 듣고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 때 써봐야겠다. 4집부터 지금까지 앨범은 무조건 구하고 있으며, 기회가 되면 꼭 그녀의 라이브 공연을 찾는다. 그녀의 공연은 정말로 열정적이며 담담한 강함과 독특한 그 어떤 울림이 느껴진다. 또한 그녀의 재즈음악에는 그밥에 그나물같은 스탠더드곡들이 아닌 우리말로 씌여진 우리만의 재즈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겉 멋만 잔뜩들어 기교만 부리고 인기많은 스탠더드 곡들만 골라 내세우는 일부 유명무실한 재즈뮤지션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녀, 재즈가수 말로만의 특색있는 재즈세계는 마주한 이들에게 잊지못할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녀의 최근 6집앨범(Malo Sings 배호)에서는 시대를 풍미했던 명가수 배호 님의 명곡들을 재해석하여 나로하여금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녀에 대한 전세계 재즈팬들의 애정과 기대는 현재진행형이다.